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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꼬꼬무 유한양행 유일한박사

by joypek 202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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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월 15일 평안도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 유년기에 미국 유학을 떠나 자립하면서 미시간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식품 사업가가 되었으며, 귀국한 후 제약업을 선택하고 1926년 서울에서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직접 차를 몰고 홍보와 보급에 나서는 등 식민지 조선의 전국 각처에 의약품과 생활용품 등을 공급하는 데 헌신했다. 이후 이승만, 박정희 시기 정치자금 미납에 대한 보복 조치로 세무 조사를 받았으나 탈세 내역이 발견되지 않아 박정희로부터는 되려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제 및 독재정권과의 결탁, 정경유착, 가족 경영, 노동자 탄압, 탈세, 부정 축재 등의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대다수의 대한민국 기업인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위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잘 상한다는 숙주나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했다. 당시 유일한의 아버지는 미국의 수도가 어디인지 몰라, 그냥 그 나라 땅의 중앙이겠거니 하면서 유일한을 미국 대륙의 정중앙으로 보내게 된다. 큰돈이 들 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 1909년 그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한다. 유일한은 고교 시절 미식축구부에 활동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에는 University of Michigan에 입학하게 된다. 대학교를 졸업한 유일한은 재미 중 중국인 및 중국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물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했다. 한편 독립운동을 하며 자산을 모두 쓴 서재필에게 유일한이 찾아와 함께 New Il- han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조선에 있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장 애비슨의 귀국 권유로 연희전문학교 상과( 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자리에 유일한을, 유일한의 처 호미리에게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제의해 귀국하기로 한다.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1926년에 귀국하여 경성부 종로 정목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리고 유일한의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아들을 유학 보냈으나 식품회사 경영을 하던 아들에게 실망해" 내가 겨우 숙주나물 장사나 하라고 너를 미국에 보낸 줄 아느냐? 유일한은 당시 한국인들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중국계 미국인이었던 처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소아들을 치료했다.
그의 경영 철학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1928년 7월 9일에 유한양행 최초의 신문광고를 냈다. 그러나 유일한은 제품의 이름과 용도를 밝히는 것은 물론, 의학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실어 제품을 증명했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 경영을 실천하고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했으며, 훗날 유한양행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되고 유일한 본인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1909년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고,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독립운동결의문 기초작성 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회장에서 직접 낭독했다. 하지만 국내 침투 직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바람에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고, 유일한은 살아생전 이 작전에 참여한 사실을 일절 함구하여 동생 유특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 1946년 7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철저히 법인세를 냈던 유한양행은 1968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았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정부패 단속을 위한 시범케이스로 어느 기업을 때려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권 생각만 그럴 뿐 현실은 그것을 이용한 기업인들과 정치인끼리 정치자금을 대가로 서로 봐주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일한은 성격상 당연히 정치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했다. 국세청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 처음엔 예고하고, 다음엔 불시에 조사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유한양행을 조사했으나, 당시 세무조사원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는 사람이 진짜 있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탈세 내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튼 정치자금을 거절한 일종의 괘씸죄로 시범케이스로 걸려 국세청으로부터 수개월간 세무조사를 받은 셈이니 이건 박정희 정권이 명백히 잘못한 것이다. 유한양행이 박정희 정권에서 요구한 정치자금을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리 탈세와 탈루 등 조세 포탈 혐의를 낙인찍어 수개월간의 세무조사를 벌였음에도 단 하나의 혐의점도 찾지 못하자 정치자금을 거절한 것을 명분으로 세금을 성실히 납부한 기업을 누명을 씌웠다는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고, 게다가 제조한 약품들도 관련 당국에 갖고 가서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해 보니, 약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이에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해서 1968년 유한양행에 동탑 산업 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계몽사 위인전( 어린이 그림 전기) 유일한 편에는 박정희 정부 당시 조사원이 엄격하고 공정한 세무조사를 했다고 하여 해외여행 포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쓰여 있으며, '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 웅진싱크빅)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된 걸 보면 사실로 추정된다. 유일한의 남동생인 유특한이 따로 차린 유유제약도 형처럼 모범 경영을 실천했다고 한다.
참고로 세무조사는 일제 말기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이 이승만의 외교론을 좋지 않게 본 것과는 별개로 유일한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했으며 그의 외교론이 독립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 내 한인들과 독립운동가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유일한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미국 우선주의 외교정책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면서도 지나친 미국 우선주의를 경계한 것인데 이승만이 유일한을 정적으로 간주해서 지나치게 적대적으로 나갔다는 평이다. 1969년 노환으로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 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했다. 당시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 전문경영인 제도가 실시된 건 대한민국에서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에이비슨 박사에게 각각 연전 상과 교수와 세브란스 소아과 과장을 제의받았던 인연이 있었다. 이 경영권 인계에도 일화가 있는데, 1969년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들 유일선이 한국으로 와 유한양행 부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유일한은 처음부터 아들이 회사에 취임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임원진들이 유일한에게 록펠러, 포드 등 해외기업의 2세 경영권 인계 사례를 그에게 여러 차례 보여준 끝에 결국 유일선의 부사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호사 출신의 유일선을 처음부터 좋지 않게 본 유일한은 결국 의견 차이가 벌어졌다. 이후 당시 유한양행에서 근무했던 연만희와 대화에서 유일한은 연만희에게" 내가 살아 있을 때 다 정리하고 나가야 유한양행이 영원히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는 거야.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비롯한 일가친척들을 모조리 유한양행에서 해고하고 주식도 처분해서 유한양행 경영에 전혀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이 유한양행의 전문경영인 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역대 유한양행의 CEO들은 모두 경력이 유한양행 평사원부터 시작했다. 정관에 의해서도 6년 이상은 있을 수 없는 데다 유한양행 사원으로서 시작이 자리에 오른 뒤 6년 내에는 퇴사해야 하기 때문에 퇴사하여 이후 2021년에는 조욱제 대표가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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